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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대학을 다니며 기말때 제출했던 글이다. 성적도 몹시 잘나왔고, 워낙에 좋아하는 책이고, 또 글도 나름 깔끔하게 쓴 듯하여 그냥 공개.
본연의 나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을지도 모른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 이방인은 첫 문장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기존에 갖고 있던 가족의 관계를 해체하는 것과 동시에 시간의 개념 또한 파괴시켜버린다. 우리에게 어머니란 늘 추억의 대상이다. 또한 되돌아가고 싶은 향수의 절정이다. 어머니의 추억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그것은 또한 불우한 가정환경을 지닌 동정의 대상이로 비춰진다. 우리 삶에서 어머니의 존재란 결코 배제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첫 문장에선 그걸 과감히 없애버렸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간조차 알지 못한다.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어제인지 헷갈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관에 뉘여 있다. 그럼에도 뫼르소는 태연하게 담배를 핀다. 그것도 연거푸 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엇이 슬픈지 무엇이 행복한지 모른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어머니의 죽음과, 사랑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여자와의 시간들은 일반적인 사람이 보기에 이해하기 힘들다. 너무도 태연한 뫼르소의 일상은 무덤덤하다 못해 무미건조하다.
뫼르소는 이웃집 불량배와 친해진다. 그와 함께 놀러갔다가 사소한 트러블에 휘말리게 된다. 뫼르소는 그때도 별 생각이 없다. 칼 든 아랍인의 위협에서 피하기 위하여 자신은 권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리쬐는 태양에, 너무도 후덥지근한 날씨에 뫼르소는 스스로의 사고가 마비되었던 것처럼 표현한다. 우발적으로 총을 발사한다. 당황한 나머지 멍한 듯 하지만 누워있는 아랍인에게 연거푸 총을 쏜다. 아랍인은 죽고, 살인을 한 죄로 사법부에 기소를 당한다. 하지만 판사는 이 사건에 대하여 그다지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하지만 뫼르소의 애인인 마리의 증언으로 사건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기존에는 칼을 든 아랍인에게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행동의 정당방위로, 우발적으로 총을 쐈고 프랑스령 아래에 있는 알제리인의 죽음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님의 돌아가신 직후의 태도를 사법부가 알아버렸다. 판사는 묻는다. "자네는 신을 믿는가?" 뫼르소는 대답한다. "믿지 않는다." 판사는 고개를 젓는다.
뫼르소에게는 흔한 도덕성이 결여되어있다.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전날의 피곤함만이 지배하는 육체덩어리를 질질 끌고 침대로 돌아가기만을 바랄뿐이다. 사회성 또한 없다. 이후에 치룬 장례식에도, 살인 이후의 재판 속에서도, 그는 너무도 무지하고 알아볼 생각도 없다. 거기다가 종교에 관한 의식도 없다. 그는 그저 욕구에 충실한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일련의 사건들과 사건의 재편으로 판사는 뫼르소에게 가졌던 동정심을 거둔다. 검사는 어머니의 죽음에 냉소적인 뫼르소를 재판에서 공격한다. 그리고 내려지는 사형판결에도, 뫼르소는 그저 사형을 언도 받았구나 딱히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할 말도 없고 항소할 의지도 없다.
교도소의 생활에서, 그는 철저하게 욕구 중심적으로 움직인다. 처음엔 속박당한 자유에 대한 갈구함이 있었다. 이후엔 성욕, 수면욕 등 그저 하루하루 욕구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 이전까지 가졌던 사회성은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 뫼르소는 마지막에 격정적인 감정을 내뱉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 앞에서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상관없고 그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유죄로 자신은 죽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끝에 가서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일반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작품이다. 수많은 나라에 번역이 되었고 아직까지 팔리는 스테디셀러이다. 이 책에서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을 홀리게 만들었던 걸까.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은 종교에서 눈을 돌리게 된다. 참혹한 현실에 관념적인 종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나온 철학 사조가 바로 '실존주의'이다. 알베르 카뮈의 학문적 동료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인간은 그저 세상에 던져져 있을 뿐이다. 바라고 희망해마지않는 '본질'이란 것은 인간에게는 없다. 스스로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도 본인이 아니다. 철저하게 본인의 존재에 대하여 파고드는 것이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인간은 많은 것들을 해체하게 된다. 해체하고 나서 인간은 극단적인 허무를 깨닫는다. 이 극단적인 허무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원래부터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구속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나간다. 이러한 사고가 갖춰지기 전에 지나온 과도기적 상황에서 알베르 카뮈는 사회의 껍질을 벗겨낸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너무도 사실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그렸기에 이 책을 읽는 순간 나는 너무도 쉽게 몰입이 되었다. 마치 내가 정말 그러하듯, 뫼르소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들과 튀어나온 못 같은 주인공의 형태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을 흡수해버린다. 어째서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탔을까? 아마도 스스로를 정의내리지 못하고 사회의 만들어진 틀에 주조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이 책은 너무도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쉽다. 장편의 긴 소설은 아니지만 묵직하고, 그럼에도 짧은 시간에 금방 읽혀진다. 시간이 지나도 명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한다. 벌써 몇 번이나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며 복잡한 생각 속에 잠긴 나는 나의 생각을 하나하나 해체해본다. 본연의 나의 모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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